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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정보

관광자원의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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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관광자원의 대표적 분류 방법

 

1. 의의 : 관광자원의 분류는 동질의 자원을 한 종류로 묶어 이용 및 보전의 효율성을 높이고, 자원의 개발과 이용에 특성을 부여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관광자원 분류 방법은 학자들의 지론에 따라 독특한 형태를 지닌다. 한국과 일본은 주로 유형과 무형으로, 장녀과 인문으로 크게 분류하는 특성을 보이는 반면, 서양의 경우 관광개발을 전제로 관광자원의 범위를 시설, 교통, 상부 구조와 하부 구조 등이 결합된 포괄적인 영역까지 확대하고 있다.

 

2. ㅎ나국관광공사의 관광자원 분류 : 1983년에 한국고나광공사에서 국민관광종합개발계획 수립 시 분류한 관광자원의 유형을 살펴보면, 우선 관광자원을 유형과 무형으로 대별하였다. 또한 유형 고나광자원을 자연적 관광자원과 문화적 관광자원, 사회적 관광자원, 산업적 관광자원, 관광레크리에이션 자원으로, 무형 관광자원을 인적 관광자원과 비인적 관광자원으로 분류하였다.

 

1. 도라산 전망대

경기도 파주시 군내면 점원리에 있는 전망대로 서부 전선 군사 분계션 최북단에 자리 잡고 있다. 건물 총면적은 803.3㎡로, 관람석(500석), VIP실, 상황실 등으로 이루어져 있고 망원경 수십 대가 설치되어 있다. 이곳에서는 개성 공단과 개성시 변두리의 모습이 선명하게 보이며, 그 밖에 송악산, 금암골(협동 농장), 장단역, 북한선전마을 기정동, 김일성 동상 등이 바라보인다. 전망대 바로 옆에는 제3땅굴이 있다. 1978년 발견된 제3땅굴은 1,635m, 높이 2m, 폭 2m로 1시간당 3만 명의 병력이 이동 가능한 규모이다. 땅굴 앞에는 분단의 역사와 자연 생태계 영상을 담은 입체 영상물을 상영하는 DMZ

 영상관과 비무장 지대 관련 유물과 자료를 전시하는 전시관, 상징 모형물, 기념품 판매장 등의 시설이 설치되어 있으며, 모노레일을 타거나 걸어서 땅굴 내부를 관람할 수 있다.

 

3. 문화재의 분류

 

문화재는 크게 문화재보호법 또는 시도문화재 보호 조례에 의하여 보호되는 지정문화재와 법령에 의하여 지정되지는 ㅇ낳았지만 문화재 중에서 지속적인 보호와 보존이 필요한 비지정문화재로 구분된다.

 

4. 구성부재1) 기단 : 집터를 잡고 터를 다듬은 다음에 터보다 한층 높게 쌓은 단을 말한다. 구조적으로 기둥과 초석을 통하여 내려오는 건축물의 전 하중을 지반에 전달하고, 의장적으로는 건물의 형태를 시각적으로 부각시키고 안정감을 주며, 주 건물과 부속 건물의 위계를 부여하기도 한다. 이 밖에도 습기 방지와 통풍의 기능과 함께 건축의 내외 공간을 연결하는 매개체 역할도 한다.

 

2) 초석 : 주초 또는 주춧돌이라고 하며, 기둥 밑에 놓여 기둥에 전달되는 지면의 습기를 차단하고 건물의 하중을 분산시켜 지면에 효율적으로 전달함으로써 건물 자체가 오나전하도록 하는 기능을 지닌 석재이다 

 

** 그렝이 공법(그렝이질)

 

그렝이 공법이란 자연 초석을 이용하여, 기둥을 세울 때 초석을 가공하지 않은 자연 상태로 이용하기 위하여 기둥의 재료를 가공하여 합을 밪추는 방식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기둥에 사용되는 목재가 석재에 비하여 가공하기 십기 때문에 초기 건축 양식으로 시작되었다고 추정되며, 건물의 기둥뿐만 아니라 ㅅ어곽의 축조에서도 자연석을 끼워 맞추워 쌓는 방식으로도 활용되었다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건축 양식이기도 하다. 

 

3) 우데기울릉도의 전통가옥인 투막집에서만 보이는 벽의 형태로 눈보라와 비바람 햇빛 등을 막기 위하여 집채에 설치한 울릉도 특유의 외벽을 말한다. 집의 벽체(투방벽)에서 130~150mm의 간격(공간)을 두고 설치하는데, 벽체가 내벽 역할을 하고, 우데기가 외벽 역할을 한다. 벽체와 우데기 사이에 부엌, 화장실, 장독대 등이 위치하며 많은 눈이 내리는 겨울철에는 가족들의 옥내 활동 공간으로 이용된다. 

 

3) 정주간부엌과 안방 사이에 벽 없이 부뚜막과 방바닥이 한 평면으로 된 큰 방으로 함경도 지방의 겹집에서 볼 수 있는 특이한 공간이다. 겹집의 여러 방 강ㄴ데 이용률이 가장 높은 공간으로, 이곳에서 손님을 맞이하고 온 가족이 모여 식사도 하며, 노인(주로 여자)들은 어린아이들과 함께 잠을 자기도 한다(부뚜막에서 가장 가까워서 따뜻하기 때문이다)

 

5. 조선 시대의 궁궐개경의 수창궁에서 즉위한 태조는 1394년(태조 3년) 9월에 신도궁권좃어도감을 설치하고 정도전 등에게 한양의 종묘, ㅏ직, 궁궐, 시장 등의 터를 정하게 하였고, ㅎ나 달 후 ㅎ나양으로 천도하였다. 하지만 아직 궁궐을 짓지 못하였떤 관계로 우선 옛 한양부의 객사를 이궁으로 사용하였다. 1395년(태조 4년) 9월 29일에 경복궁이 준공되었고, 태조는 같은 해 12월 28일에 입궐하였다. 태종 세종 때를 거치면서 경복궁 동쪽 종묘 옆에는 이궁인 창덕궁을 짓고 태종 때는 경회루를 지었으며, 셎오 때는 동궁과 교태전, 군기고, 문루, 궁성 동편 연못, 그리고 궁성의 북대문인 신무문을 건립하여 사대문을 모두 마련하는 등 여러 차례 건축 공사를 시행하였다. 특히 세종 떄 시간을 알리는 보루각을 짓고 자격루를 설치하였으며, 흠경각을 만들고 옥루를 설치하는 등 시보 장치를 궐 안에 두어 왕도 정치의 근본을 마련함으로써 비로소 법궁의 면모를 갖추었다. 

 

경복궁 : 서울특별시 종로구 세종로에 있는 조선 시대의 정궁으로 궁의 명칭은 시경 주아에 나오는 "이미 술에 취하고 이미 ㄷ거에 배부르니 군자만년 그대의 큰 복을 도우리라"에서 두 자를 따서 경복궁이라고 지었다. 경복궁은 1399년(정종 1년) 3월에 개경 호나도를 비워졌다가 1404년(태종 4년)에 다시 한양으로 천도하여 정궁이 되었다. 이듬해인 1405년 (태종 5년)에 다시 한양으로 천도하여 정궁이 되었다. 이듬해인 1405년(태종) 태종이 창덕궁에서 머물면서 다시 비웠다. 하지만 태종은 경복궁을 그대로 둔 것이 아니라 경복궁 궁성의 서쪽 모퉁이에서 명당수를 금천으로 끌어들이는 등 여러 번에 걸쳐 수리하였따. 이후 세종도 경복궁에 다양한 건물들을 축조하였으며, 창덕궁에서 경복궁으로 옮겨 경복궁을 법궁으로 사용하였다. 세종 이후 경복궁은 명종 8년에 큰 불이 나 강녕전, 사정전, 흠경각 등이 소실되어 명종 9년에 복원하였고, 그 후 선조 25년 4월 임진왜란 때 전소되었다. 도성으로 돌아온 선조는 여러 차례 중건 공사에 대하여 논의하였으나 실현하지 못하였으며, 숙종 때에도 논의한 적이 있었으나 중건하지 못하였따. ㄱ여복궁의 중건은 흥선 대원군의 강력한 ㅈ우건 의지를 받아들인 대왕 대비가 1865년(고종 년) 4월에 경복궁 중건을 하교하면서 시작되었꼬, 1867년(고종 4년) 10월에 완성되었다. 하지만 1876년 (고종 13년) 11월에 큰 화재가일어나 내전 830여칸이 소실되었고 1888년(고종 25년)에 이르러 재차 중건하였다. 

 

1910년에 국권을 잃자 일본인들은 궁 안의 전, 당, 누각 등 4,000여 칸의 건물을 헐어서 민간에 판매하였고,  1917년에 창덕궁의 내전에 화재가 발생하자 경복궁의 교태전, 강녕전, 동행각 등을 철거하여 그 재목으로 창덕궁의 대조전, 희장당 등을 지었따. 궁전 안에는 겨우 근정전, 사정전, 수정전, 천추전, 집옥재, 경회루 등과 근정문, 홍례문, 신무문, 동십자각 등이 남았으며 정문인 광화문도 건춘문 북쪽으로 이전하였다. 또한 궁의 중신ㅁ 건물인 근정전 정면 앞에 매우 큰 석조 건물인 총독부 청사를 지어 근정전을 완전히 가려 버렸다. 이 년 고아복 후밖에 자선당 자리에도 석조 건물이 들어서고 ㄱ너청궁 자리에는 미술관을 지어 궁의 옛 모습을 거의 인멸시켯다. 1945년 광복 후 궁은 공원으로 개방되는 한편, 총독ㅂ 청사는 정부종합청사로 활용되다가 1986년에 국립중앙박물관으로 명칭을 고치면서 이 건물로맞이하여  이건되었다. 이후 1995년 8.15 광복 50주년을 맞이하여 김영삼 정부가 총독부 청사를 철거하였다.  

광화문 : 1395년 9월에 창건되어 정도전에 의하여 사정문으로 명명되었고 오문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1425년에 집현전 학사들이 명칭을 고아화문이라고 바꾸었다. 고아홤누은 석축 기단에 3개의 홍예문를 만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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